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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중
닉
2009. 2. 22. 13:13
지난 주 부터인가, 모 블로그 사이트에 예전에 써놨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찾아보니 역시 2004년 이전에 썼던 글들은 하드에 저장되어있었던지라 사라지고, 2003년에 인터넷에 써놓은 글이 지금 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글이다.
어연 6년전의 골동품들을 하나씩 읽어보면서 옮겨놓다보니,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었다.
정말 우울한 글들만 남겨놨구나. -ㅅ-;
티스토리에 남겨진 글들도 읽어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_-;;
이 글들만 주욱 늘어놓고 보면 2003년 이래로 정말 암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니까.
기억의 유통기한이 5분이 넘지 않으므로 장담할 순 없지만,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자국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오히려 글로 썼던 이야기들은 대부분 말끔하게 기억에서 사라져있었다.
그러고보면, 어딘가에 글로 남기는 이야기들은 태반이 비슷한 이야기들뿐이다.
마치 거름망을 통해 좋은 일들만 남기고, 잊고싶은 것들은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 처럼.
기억속에 남아있는 추억들은 그래서 더더욱 소중하게 미화시키며 끌어안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좋은 일만 기억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이겠지만, 늘 그렇듯이 어디까지나 소망일 뿐이다.
살아가면서 끌어안고 살아가야하는 괴로운 일은 생기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 돌이켜볼 때 온갖 금칠을 시도해보아도 결코 지울 수 없었던 기억이 두 가지 뿐이란 건, 어떻게 보면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는 정말 잊고 싶은 일이었다.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하지만 친절하게도 내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아, 마치 없는 일인양 지워진 일이다.
하지만 지우고 싶다는 그런 인식 자체가 도리어 갚은 각인을 남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더더욱 고약한 건, 그 각인이 남긴 상처였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배려로 감싸고 친절로 덮어두면, 끔찍한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있었다, 당사자를 제외한다면.
어깨를 다치면 팔의 어느 부분을 움직여도 지장을 받는 것 처럼,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에 뿌리깊게 자리한 그 상처는 기능적인 행동을 모두 차단하며 통증으로 자신을 증거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처방받은 진통제로 잠시 잊어보지만, 이내 다시 돌아와 속삭인다.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어.'
두 번째는 아직도 마주하기 어렵다.
손에 들고 있기조차 괴로운 이 기억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업화이며, 그러기에 마지막 남은 용기와 감정까지 쥐어짜 태우며 의무감으로 끌어안는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곤 가해자와 피해자들뿐이기에, 친절하게 건네받을 배려조차 부족하여 아무런 방해 없이, 맹렬히 태우고 있을 뿐이다.
괴로워하는 것조차 껍질 아래에서만 허용되는 이 일만큼은,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지워서는 안되는 기억이다.
.
암울한 기록들만 남아있다고 불평하면서도, 이런 글을 남기는 이유는 이제 거름망 바깥에 내려놓기 위해서이다.
물론 두 번째 일 만큼은 어느 정도 관련있는 부분만 내놓아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 남아있긴 하지만.
누군가 물어본다면 얼버무리며 대답하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남기는 전시행정까지 빼먹지 않고 다 했으니, 마찬가지로 몇 년 뒤에는 '이 글을 왜 남겼을까?' 할 정도로 고민하길.
(여담이지만, 예전에 쓴 글들을 읽어볼 때마다 분명히 행간에 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 가 없어서 고민했었다. -_-;;)
자, 이제 남은 건 자연제독!
찾아보니 역시 2004년 이전에 썼던 글들은 하드에 저장되어있었던지라 사라지고, 2003년에 인터넷에 써놓은 글이 지금 구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글이다.
어연 6년전의 골동품들을 하나씩 읽어보면서 옮겨놓다보니,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었다.
정말 우울한 글들만 남겨놨구나. -ㅅ-;
티스토리에 남겨진 글들도 읽어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_-;;
이 글들만 주욱 늘어놓고 보면 2003년 이래로 정말 암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니까.
기억의 유통기한이 5분이 넘지 않으므로 장담할 순 없지만,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자국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데.
오히려 글로 썼던 이야기들은 대부분 말끔하게 기억에서 사라져있었다.
그러고보면, 어딘가에 글로 남기는 이야기들은 태반이 비슷한 이야기들뿐이다.
마치 거름망을 통해 좋은 일들만 남기고, 잊고싶은 것들은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 처럼.
기억속에 남아있는 추억들은 그래서 더더욱 소중하게 미화시키며 끌어안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좋은 일만 기억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이겠지만, 늘 그렇듯이 어디까지나 소망일 뿐이다.
살아가면서 끌어안고 살아가야하는 괴로운 일은 생기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 돌이켜볼 때 온갖 금칠을 시도해보아도 결코 지울 수 없었던 기억이 두 가지 뿐이란 건, 어떻게 보면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는 정말 잊고 싶은 일이었다.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하지만 친절하게도 내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아, 마치 없는 일인양 지워진 일이다.
하지만 지우고 싶다는 그런 인식 자체가 도리어 갚은 각인을 남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더더욱 고약한 건, 그 각인이 남긴 상처였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배려로 감싸고 친절로 덮어두면, 끔찍한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있었다, 당사자를 제외한다면.
어깨를 다치면 팔의 어느 부분을 움직여도 지장을 받는 것 처럼,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에 뿌리깊게 자리한 그 상처는 기능적인 행동을 모두 차단하며 통증으로 자신을 증거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처방받은 진통제로 잠시 잊어보지만, 이내 다시 돌아와 속삭인다.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어.'
두 번째는 아직도 마주하기 어렵다.
손에 들고 있기조차 괴로운 이 기억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업화이며, 그러기에 마지막 남은 용기와 감정까지 쥐어짜 태우며 의무감으로 끌어안는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곤 가해자와 피해자들뿐이기에, 친절하게 건네받을 배려조차 부족하여 아무런 방해 없이, 맹렬히 태우고 있을 뿐이다.
괴로워하는 것조차 껍질 아래에서만 허용되는 이 일만큼은,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지워서는 안되는 기억이다.
.
암울한 기록들만 남아있다고 불평하면서도, 이런 글을 남기는 이유는 이제 거름망 바깥에 내려놓기 위해서이다.
물론 두 번째 일 만큼은 어느 정도 관련있는 부분만 내놓아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 남아있긴 하지만.
누군가 물어본다면 얼버무리며 대답하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남기는 전시행정까지 빼먹지 않고 다 했으니, 마찬가지로 몇 년 뒤에는 '이 글을 왜 남겼을까?' 할 정도로 고민하길.
(여담이지만, 예전에 쓴 글들을 읽어볼 때마다 분명히 행간에 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을 수 가 없어서 고민했었다. -_-;;)
자, 이제 남은 건 자연제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