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새가 있었다.

두 날개, 부리 하나, 두 발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새였다.
점잖지 못한 화장실 습관마저 갖춘, 자칫 그저 그런 새 한마리로 평가받을 뻔한 이 새에게도 남들과 다른 점 한 가지 쯤은 물론 있었다.

새는 날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날짐승이었기에, '5분 정도라면 날 수 있다'라는 주장으로 자신의 특징을 거부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특이사항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불편하지만 살아갈만한 장소인 도시에서 태어난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낙천적인 부분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낙천적인 성격이 끼니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다지 배부르진 않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던 새에게 유난히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배를 곯는 날이 잦아 점점 초라해지는 행색이 새에게 또 다른 특징이 되진 못했다.
주변의 다른 새들도 같은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동사(凍死)라는 차별성이 점점 평범해지던 어느 날, 새는 자신에게서 더 이상 낙천성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이 깨달음은 각자(覺者)에게 모종의 행동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새는 울었다.
현실에 대한 내성이었던 낙천적인 성격이 제기능을 못하게된 지금,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은 너무나 차가웠다.
따라서 이 발현이 오래동안 계속되었던 건,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하지만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먹이의 출현에 새는 당황하지 않았다.
먹이보다 더 가까이에 있던 위기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뒤에야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때는 이미 먹이가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다.
덕택에 그는 자신의 특징 한 가지를 어려움 없이 추가할 수 있었다.

새는 자신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릅답다기보다는 애달프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지만, 새에게는 표현보다는 그 결과가 더 중요했다.
생존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그리고 새에게 나눠주는 음식이 부담되지 않았던 주변의 생물들은 기꺼이 새에게 먹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물론 대다수는 인간들이었지만, 도시에 사는 다른 모든 생물들 역시 조금씩 먹이를 나눠주었던 걸 보면, 새의 노래는 종족을 뛰어넘는 감동을 주는, 보기 드문 예술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새는 다시 한 번 낙천성을 되찾았고, 도시에서 태어난 행운에 감사했다.
인간을 포함한 주변의 생물들은 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행운에 즐거워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새의 노래는 그 깨달음, 정확하게 말하면 냉혹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감사할 줄 아는 새의 노래에서 그 종족을 뛰어넘는 감동이 사라지는 것은 도시의 모든 생물들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이 모든 생물의 염원이었지만, 새의 목소리는 언제부터인가 평범한 지저귐으로 변해있었다.

새의 노랫소리가 다시 한 번 애달픔을 담은 날, 도시의 모든 생물에게도 깨달음이 찾아왔다.
늘 그렇듯이, 이 깨달음은 각자(覺者)들에게 모종의 행동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 도시의 모든 생물은 일년내내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새 한마리는 일년내내 겨울 속에 살게 되었다.
이젠 아무도 그 새를 평범하다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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