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라고 해야 할까.
원래 뭔가 일을 하면서도 별의 별 온갖 잡생각을 다 하는 편이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을 때도, 무언가 먹고 있을 때도, 어딘가 걸어가느라 발걸음이 바빠지는 때에도 역시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자기 멋대로의 덧칠로 그림을 그려놓은 채 혼자 논평한다.

학교다닐 때는 도움이 많이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학교에서 착실하게 수업 듣는 타입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수업 시간을 활용해 활자와 그림에 매진한 시간이 훨씬 많았지만, 이런 잉여적 기술(-_-) 덕택에 항상 주의력의 일부는 수업에 할당해 뒀으니.
중간중간에, 교사 계급의 전통적인, '다음 너 읽어봐'라는, 의심가는 학생 골라내기 기술이 들어와도 당황치 않게 해주는 부수 효과도 있었고, 다행히 성적도 낙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뭐, 최소한 부모님 모시고 오란 소리는 안들었던 듯;;;

세월이 흐르고 흘러 점점 머리도 굳어가고, 요샌 색칠해도 남들과 같은 색을 칠하라는 교정에 익숙해지면서, 잡생각이 많이 줄었다.
예전엔 간단히 흘깃 보고도 할 수 있었던 것들이 무척이나 어려워져서 난감해지는 경우도 부쩍 늘었지만.
그 때문인지, 새로운 생각을 떠울리는 것도 이젠 뇌가 지쳤나보다.
주의력이 흐트러진다 싶을 때를 골라 두서없이, 무엇이 촉매가 되었는 지도 모른 채, 자기 멋대로의 옛날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기억의 갈피를 넘겨 한 곳을 펴는 데는 특별한 기준은 없는 듯 하다.
무언가 말라붙은 자국, 구석을 작게 접어놓은 곳, 특별히 그림이 더 많은 곳을 골라내는 경우도 있지만, 옆 장보다 그저 몇 줄 더 길다는 이유로, 여백이 깨끗하니까, 라면서 한 곳을 펼쳐 들이밀고는 읽어보길 강요한다.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던, 어디에 앉아있건 일체의 거부권을 용납하지 않은 그 단호한 태도에 못이겨 들여다 본 곳엔, 역시나 대중 없는 전개가 가득하다.
슬픈 내용, 기쁜 내용, 잊어버리지 않고 각인시키겠다고 한 먼지 덮인 내용,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겠다던 깊은 상처자욱,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떠올리며 기운내려 했던 잊혀진 이야기.
어느 다른 이야기보다도 더 쉽게 자신을 빠뜨릴 수 밖에 없는 감정의 격류가 시간도, 장소도, 그리고 방향도 고려하지 않고 몰아친다.
그런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 안간힘을 쓰며 현실의 닻을 어디에든 비끌어매려고 하는 자신이 있다.
이 파도가 익숙해지면, 그 때는 이제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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